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델리 술탄국 (문단 편집) === [[노예 왕조]] (1206~1290)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노예 왕조)] ||[[파일:qutab-minar.jpg|height=300]]||[[파일:d3dc4334af7b6f6d5d4e4c7f43be0127.gif|height=300]]|| ||쿠트브 미나르||노예 왕조의 강역|| [[고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무함마드는 1206년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후손이 없었으니 무함마드가 정복했던 영토들은 무함마드 휘하의 장군들에게 나눠져 분배되었다. 가즈니 지방[*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은 타지 웃 딘 얄두즈 장군이, [[벵골]] 지방은 무함마드 빈 박티야르 할지 장군이, [[물탄]] 지방은 나시르 웃 딘 카바차 장군이, 델리와 [[라호르]]를 중심으로 한 인도 지방은 [[총독]]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가 각각 나누어 가졌다. 이때 델리를 차지한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가 개창한 왕조를 델리 술탄국의 시작이라고 보는데, [[술탄]]에 즉위한 아이바크가 사실상 노예 출신이었기에 이 왕조를 '노예 왕조'라고 부른다.[* 학계에서는 '맘루크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보통 노예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아이바크는 즉위 직후 물탄을 차지한 카바차 장군 및 가즈니를 차지한 얄두즈 장군과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인도 내의 영토들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이바크는 순수하게 [[인도]]의 술탄이 되어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포함한 서부 이슬람 세계와 확연히 문화적, 사회적으로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바크는 1206년부터 1210년까지 술탄으로 재위했다. 그는 [[라호르]]를 수도로 잡고 델리를 거점으로 북인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델리 최초의 [[모스크]]들 중 하나였던 쿠트브 미나르를 건설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술탄 아이바크는 [[라호르]]에서 [[폴로]]를 하던 중 낙마하여 입은 부상으로 결국 1210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알람 샤가 새로운 델리의 술탄으로 즉위했다. 알람 샤가 새로운 술탄이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바크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덜컥 왕좌를 차지한 것이었고 왕국 내에는 그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넘쳐났다. [[벵골]]의 귀족 등을 포함한 무슬림 귀족층이 알람 샤에게 반기를 들었고, 40명의 귀족 대표들이 모여 [[우타르프라데시]] 총독이었던 [[일투트미쉬|샴스 웃 딘 일투트미쉬]]에게 새로운 술탄이 되어주십사 요청했다. 당연히 일투트미쉬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한 후 델리로 진군했고, 1211년 델리 인근의 주드 평원에서 알람 샤의 군대를 꺾으면서 델리 술탄국의 제3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일투트미쉬는 1211년부터 1236년까지 재위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216년에는 [[호라즘 왕조]]의 침략으로 가즈니 지방을 다스리던 얄두즈가 인도로 쫒겨와 일투트미쉬에게 인도 내의 지분을 요구하자 단칼에 거절하고 얄두즈를 숙청해버렸다. 또한 [[라호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카바차 장군과도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한편 이 일투트미쉬의 재위기에 [[몽골 제국]]의 대침공이 일어났다. 자신의 사신들을 모욕한 것에 대노한 [[칭기즈 칸]]이 군대를 몰아 [[호라즘 왕조]]를 공격하자, 몽골 기병의 위력에 놀란 호라즘 왕조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때문에 이미 북인도 상당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델리 술탄국과도 마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일투트미쉬는 몽골 기병의 악명을 전해들었는지 아니면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호라즘 왕조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 심지어 영토 내부로 직접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공세를 펼치지도 않은 채 철저한 수세 위주의 전략을 폈고, 나중에 1224년에 호라즘 왕조가 완벽히 패망하고 몽골군도 어느 정도 물러갔을 무렵에서야 다시 인더스 강 유역, 그리고 그 동쪽 영토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호라즘군과 몽골군이 물러가면서 왕국 서부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일투트미쉬는 인도 동부를 정복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227년에는 [[벵골]]을 집어삼켰고, 1226년에는 란탐보르를, 1227년에는 술탄 아이바크 사후 독립을 선포했던 만달로어 지방을 재합병했다. 1228년에는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려 인더스 강 유역을 침공했다. 일투트미쉬는 [[물탄]]을 지배하던 카바차 장군을 꺾고 [[펀자브]]와 [[신드]] 주의 거대한 영토를 합병했으며, 이렇게 델리 술탄국이 승승장구하면서 점점 위세가 커지자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는 일투트미쉬에게 인도 내의 전 무슬림들을 다스릴 권한을 인정하면서 그의 인도 내 권위를 일부러 높여주기까지 했다. 일투트미쉬는 칼리파의 정식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펼치면서 델리 술탄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벵골의 반란을 진압했고 [[마디아프라데시]]를 점령했으며 빌사와 우자인 지방을 성공적으로 합병했다. 일투트미쉬의 업적은 단순히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았다. 일투트미쉬는 체계적인 조세와 조세 효율을 위하여 은화와 동화를 국가에 도입하고 관료들의 계급을 확립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많은 일들을 했다. 또한 수많은 궁전과 모스크, 건물들을 지어 술탄의 위엄을 드높였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까지 짓는 등 노예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노예 왕조는 일투트미쉬 사후 점차 쇠락했다. 제4대 술탄 루쿤 웃 딘 페로즈는 국정에 관심이 없어 정무를 모후에게 맡기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7개월만에 보다못한 귀족들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5대 [[여성]] 술탄인 [[라지아 술타나]] 역시 [[아프리카]]계 [[흑인]] 귀족을 가까이 하면서 튀르크계가 주류였던 귀족들의 반감을 사 결국 쫒겨났다.[* 참고로 '''라지아 술타나는 이슬람권에서 정말 보기 드문 [[여왕|여성 군주]]였다.''' 1236년부터 1240년까지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던 무이즈 웃 딘 바흐람은 귀족들의 지원을 뒤에 업고 라지아 술타나의 군대를 깨부순 다음 왕위를 찬탈했다.[*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라지아 술타나는 남편과 함께 남아있는 군대를 데리고 카이탈 지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병사들은 라지아 술타나를 버렸고, 결국 1240년 10월 14일에 강도를 당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제6대 술탄 바흐람의 통치도 1240년부터 1242년까지 2년여를 가지 못했다. 바흐람 치하의 델리 술탄국은 빠르게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귀족들은 편가르기에 빠져 집안 싸움을 일삼았고, [[몽골]] 군대가 [[라호르]]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같은 위기 속에서 술탄 바흐람은 유약한 대응을 하면서 귀족들의 신임을 잃었다. 결국 바흐람은 델리의 요새에 갇혀 유폐되었고, 1242년에 바흐람이 사망하자 제7대 술탄인 알라웃딘 마수드가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즉위했다. 알라웃딘은 술에 빠져 국정을 방기했으나, 점차 권력 문제로 귀족들과 다툼이 생겼고 결국 4년 만인 1246년에 귀족들에게 쫒겨나고 말았다. 대귀족들이 알라웃딘을 쫒아내고 제8대 술탄으로 옹립한 이는 알라웃딘의 [[사촌]]이자 명군 일투트미쉬의 손자였던 나시룻딘 마흐무드였다. 나시룻딘은 국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대신 종교에 깊이 심취한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냈고 약자와 빈곤층들을 도와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술탄이 종교에 빠져 국무를 보지 않았으니 국정은 대부분 [[섭정]]을 맡고 있던 기야스 웃 딘 발반이 맡아 처리했다. 이렇게 종교에만 빠져 산 덕택에 술탄 나시룻딘은 약 2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술탄직을 지킬 수 있었다. 1266년 나시룻딘이 사망하자 섭정 [[기야스 웃 딘 발반]]이 제9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기야스 웃 딘 발반의 치세에 노예 왕조는 잠깐의 중흥기를 맞는 듯 보였다. 발반은 북인도 전체에 델리 주도하의 질서 확립을 위해 힘썼고, 대귀족들의 세력을 분쇄했으며 몽골군의 끊임없는 침략에도 빠르게 대응했다. [[왕권강화]]에 엄청난 신경을 쏟았던 술탄 발반 덕분에 델리 술탄국은 잠시 동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포악한 발반의 무리한 왕권 강화는 내실이 영 부족했다. 1287년 발반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제10대 술탄이자 마지막 술탄인 무이즈 웃 딘 무함마드 카이카바드가 즉위했다. 그러나 카이카바드는 즉위 당시 13세로 워낙 어렸던 탓에 국정에 관심이 없었다. 4년 후 그가 급성마비로 병세가 악화되자 1290년 할지족 출신의 신하 [[잘랄 웃 딘 할지]]가 그를 암살했고, 이로 인해 노예 왕조는 85년 만에 무너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